[ 고난의 의미 ](룻1:1-5)
누구에게나 인생은 형통한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되도록 하셨습니까? 장래 일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1. 인생에는 여러 가지 고난이 주어집니다.(고난의 종류)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세상에서 고난이 많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에서 다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많은 고난에는 다 똑 같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의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고난은 “하나님 앞에 죄가 있어 당하는 고난”입니다. 아마도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나일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매를 대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우리는 징계라고 합니다. 징계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두 번째 고난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당하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서 애매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애매한 고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는 억울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을 때에, 그것은 곧 아름다운 믿음의 성숙이 주어지는 열매가 됩니다. 세 번째 고난은 고난 받을 줄 알면서도 자원함으로 받는 ‘사명적 고난’입니다. 사명적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자취하는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고 박해를 받는 고난입니다. 이렇게 사명적 고난을 자취하는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며 모세도, 사도바울도 힘차게 전진하지 않습니까?
2. 첫 번째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적신호’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치면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런 멋진 이름을 가진 부부 두 사람이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찾아왔다고 메시야의 약속을 버리고, 육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압 땅으로 내려갔다는 것이 잘못된 선택입니다. 나오미가 흉년이라는 문제에 도피했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비극적인 사건의 연속’입니다. 풍족하게 떠났던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빈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우리의 인생은 영적 질병과 상실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난을 ‘영적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이 편안하고 안락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개가 모래가 부드러운 살에 박히는 고난을 인내한 결과물이 바로 진주가 아닙니까? 성경에 하나님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와 고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반면에 ‘고난’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까워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만 바라보며 고난을 유익으로 바꾸고, 영적 성숙의 기회로 만드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