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비의 열매 ](갈5:22-23)
사실 성경은 헤세드, 하나님의 자비하심 아래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은혜를 주시며 대신 아담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순종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불순종에 대한 대가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범죄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하심의 정점! 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입니다.
1.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 그 감격을 기억하며 또 소유합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건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로마서6:23).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린 자꾸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격을, 또 그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힘써 우리가 죄인, 아니 심각한 죄인임을 기억함으로 또 죄의 유혹속에 있는 우리, 심지어 그 유혹에 흔들리며 넘어지는 우리임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헤세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우리 안에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죄없다하는 죄인들이 수두룩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은혜로 호소하지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물으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십시오(누가복음 10:25~37).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 하나 버티기도 힘든 세상이라 합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누굴 배려하고 누굴 안타까이 여기냐며! 일단 나부터 챙겨야 한다고요. 헌데 성경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내 코가 석자이듯 다른 이의 코도 석자라는 사실을! 우린 함께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도만난 자를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을 가진, 그 어떤 상황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에 집중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이리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할렐루야! 이것이 자비의 시작이며 축복의 통로입니다.
3. 자비를 베풀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 스스로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문맥(갈라디아서 5:16~26)을 살피면 우리 안에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하는 죄를 범하지만, 반면에 힘써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우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지만 쉽지 않은 덕목들이 있습니다. 문제가 문제인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우리에게 없는데도 자꾸만 그 해결책을 우리 안에서 찾기 때문에 문제가 문제입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인도하심에 집중할 때에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 놀라운 감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은 헤세드, 하나님의 자비하심 아래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 요한복음 8장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하고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옵니다. 그리고 주님께 율법에 돌로치라 명하였거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냐고 묻습니다. 죄 없는자가 먼저 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나고 여인과 주님 단 둘이 남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있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율법의 요구를 들이대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죄인을 긍휼히 여기신, 여인을 안타까이 여기신 주님의 자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헤세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