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만남 ] (막1:29-31)
본문은 열병이든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함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사람을 만나면 망가집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삽니다. 그래서 축복된 만남이 있고, 저주 같은 만남도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영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인생의 복중의 복입니다. 최고의 축복입니다.
◉ 예수님은 쓰러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반드시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누워 있을 때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지 않습니까? 아파서 누워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병상에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일로도 쓰러져서 누워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참 많습니다. 겉모습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건강하게 육체적으로는 앉아있지만 마음이 쓰러져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늘의 신령한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에 인생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무시하지 않으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 인생에 지쳐서 쓰러진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영순위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지만 예수님은 열병에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만나러 가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이 쓰러졌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만나러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자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 예수님은 쓰러진 자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의 성격은 저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 스타일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보면, ① 판단형 ② 분석형 ③ 무시형 ④ 돌봄형 ⑤ 감정형 입니다. 판단과 분석만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는 판단과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주님의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5가지 중에 첫 번째가 무엇이었을까요? ‘돌봄형’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잘못해서 쓰러졌어도 판단하지 않고 분석해서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쓰러진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3가지 동사를 살펴보면,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주시고, 일어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 세 단어가 다 베드로의 장모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병실에 누워 있는데, 주님이 그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내 손을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셔서 병이 깨끗이 나았다면 우리는 뭐라고 주님께 고백하겠습니까? “내 남은 인생은 주님을 위해서 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헌신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헌신은 억지로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쓰러졌을 때, 책망하거나 분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장모님을 먼저 만났습니까? 베드로를 먼저 만났습니까? 베드로의 장모는 베드로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만 믿고 나만 구원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가정에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가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족들과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우리 주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모시고 그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