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은 소망의 시작입니다 ] (고후1:8-10)
절망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특히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에게도 절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절망했지만 절망 속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이 있었기에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 소망은 절망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감정표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표현은 커녕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일부러 숨깁니다. 한국인이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원인은 남에게 자신을 알리기 원하지 않는 소위 “은폐 의식”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와는 반대로 자기가 당한 어려움을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환난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처절한 절망감을 숨김없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절망을 넘어설 수 있으며, 치유될 수 있습니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해야 치유가 가능한 법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믿고, 내가 나 자신을 신뢰할 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나 자신에게 절망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향한 절망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시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앞문이 막히고, 뒷문이 막히고, 옆문이 막힐 때에 비로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 문이 열리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절망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했다면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 때가 곧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의 자식도 없고 계속해서 늙어갑니다. 그리고 어디 까지 늙어갑니까? 자기 몸이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 될 정도로 늙게 됩니다.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현실을 보면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입니다. 포기해야 될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자식이 운명이요 팔자인 현실의 절망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만 의뢰할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기적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적인 현실, 환난과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과거에 나를 도우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도우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나를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절망의 입술이 소망의 입술로 바뀌게 됩니다. 욥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장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갖고 선포합니다. 사자굴속에 던져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의뢰했기에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망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허상이 믿음을 통해 실상으로 보여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기대입니다. 지금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까? 절망하십시오. 그러나 절망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절망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죽음의 절망은 부활이라는 소망의 시작입니다. 2016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속에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